만덕산 백련사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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혜장스님 이야기

다산 정약용과 혜장스님

 



다산 정약용(茶山 丁若鏞 1762~1836)은 

백련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. 

 

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온 지 4년 후인 1805년 백련사의 아암 혜장선사(兒巖 惠藏禪師 1772~1811)를 찾아와 <주역>과 <역경> 이야기로 밤을 지새운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. 정약용은 혜장선사를 만나자마자 경학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이해와 식견에 찬탄했고, 혜장선사 역시 정약용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. 

 

 

 

 

혜장선사는 동문 밖 주막집에 머물고 있는 정약용에게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겨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, 이후 서로 친밀한 교류를 이어 갔습니다. 이 무렵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<견월첩(見月帖)>에는 서로를 향한 지극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. 

정약용이 귤동 다산초당에 기거하게 된 것은 해남 윤씨의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였지만 백련사의 주지 혜장스님과 가까이 지내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. 


다산과 아암은 나이가 열 살이나 차이 나고 유가의 경학자와 불가의 수도승이라는 입장 차이도 있었지만 나이와 종교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진솔한 만남을 이어갔습니다. 이렇듯 파격적인 둘 사이의 교류는 이들이 속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사를 통찰하는 보편적 진리를 추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. 

당시 백련사의 본찰이었던 대흥사는 불경에 침잠(沈潛)하되 유가(儒家)와 도가(道家)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. 




 

 

 

대흥사에서 스물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강백(講白, 지도자)을 지냈고 승려였지만 술을 즐겨 마실 정도로 자유로웠던 혜장선사에게 경학에 밝은 학자 정약용은 비록 귀양을 온 사람이지만 가뭄에 단비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. 

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는 오솔길은 그런 둘 사이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길입니다. 둘은 서로를 그리워한 나머지 하루가 멀다하게 숲길을 오가곤 했는데, 어느 날에는 하루종일 정담을 나눈 후 밤늦게 돌아와서도 다시 가서 보고 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. 


그러나 혜장스님은 서른아홉살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. 

정약용은 혜장선사의 입적을 몹시 슬퍼하면서 ‘아암(兒巖) 장공(藏公)의 탑명(塔銘)’을 써서 그를 기렸습니다. 이 글에서 정약용은 둘이 처음 만나 <주역>을 논하던 광경을 마치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. 

혜장스님은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(草衣禪師, 1786~1866)와 정약용의 교류를 주선했으며, 그의 제자 철경응언, 기어자굉, 침교법훈, 철선혜즙도 정약용과 교유했습니다. 


훗날 초의선사가 서울의 명망 있는 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인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. 차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인연은 백련사가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. 

 

 

 

 


 

 

 

 

 

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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등록자관리자

등록일2016-11-18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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